한 아이가 수업을 왔습니다.
샘플수업과 동시에
성향파악을 하기 위해 교실로 들어갔고,
아이에게 종이를 주며 물었습니다.
"그림 그리기 좋아하니?"
"당연하죠! 저 엄청 잘 그려요."
그러고는 종이 위에 외운 듯이
전혀 망설이지 않고 큰 나무를 그렸습니다.
아이 얼굴을 보니 뿌듯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며
칭찬을 바라는 듯 했습니다.
"와~ 나무를 많이 관찰했구나?
그럼 다른 것도 그릴 수 있니?"
하지만 아이는 외운 듯이 그린
나무 그림 말고는 그리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대신 말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선생님, 근데 저건 뭐에요?
저건 어떻게 해요?”
분명 제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말이죠.
일단 아이 말에 차분히 대답해주며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무언가를 피하는 듯
저와 대화가 끊기지 않으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어요.
성향 파악지에 그림을 좋아한다고 적을 뻔했지만,
조금 더 천천히 아이와 대화를 나눠봅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이 종이에 그림 하나 그려도 돼?"
"..네"
저는 아이의 허락을 맡고 종이 위에
아이보다 조금 더 못 그린 그림체로
괴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그린 나무에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너 이거 막을 수 있어?"
그제서야 나무 위에 그림을 더 그리기 시작합니다.
더 센 괴물도 데리고 나오고,
미사일도 같이 쏴보고, 그림 한바닥 낙서를 해봅니다.
그리고 다시 물었습니다.
"너 또 뭐 그릴 수 있어?"
그제서야 아이는 새로운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미사일이 달린 자동차, 공룡이 타고 있는 로켓,
절대로 뚫을 수 없는 견고한 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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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높아
타인의 평가에 대한 민감한 친구였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습니다.
자신이 무언가 못한다는 사실이 나타날까봐
긴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아마도 "나무"는 칭찬을 받았던
경험이 있던
그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이는 저를 보고 칭찬 받는 그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자신만만하게 그렸지만,
그 다음의 그림 요구에는 당황 했을거예요.
'뭘 그려야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지?'
이런 생각이 들어 아이는 말을 돌리는 것이죠.
아이들과 함께 하다보면
자신이 잘한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친구에게 꼭 필요한 일은
"너를 평가하지 않고 있단다.
못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실제로 나도 잘 못하고.
난 못하고 잘하는 것으로 누군가를 평가하지 않아."
라는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남자아이들에게
'내가 못한다는 사실을 선생님에게 들키는 일'은
생각보다 상처가 깊고 수치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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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여러분의 아이가 그림을 그리지 않고
(혹은 다른 활동 중) 머뭇거린다면,
아이보다 더 못 그린 그림, 혹은 낙서를
먼저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의 아이가 실패가 두려워
무언가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실패하는 모습과 인정하는 모습을 먼저 보여줘야 합니다.
아이가 실패=수치심이라고 느낄 때,
수치심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감입니다.
"나도 그래. 민준아."
아빠의 이 한마디가 얼마나 아이에게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아이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진정 강한 아이로 자라게 만들어주는 한마디가
아빠의 "아빠도 이걸 못해"라고
인정하는 말, 이 한마디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